소중한 기회
                                                                                                                     이경행 학부모


호주에 첫발을 내딛고 살아온 지 올해로 12년째 접어들고 있다. 이곳에 와서 사랑하는 아내를 만났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보람의 하나는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착한 딸 수지와 활발하고 건강한 아들 건효를 가졌다는 것이다.

이곳에 이민 와서 사는 동안 즐거운 일도 많았고, 또한 슬픈 일도 많았는데 요즘에 와서 수지가 우리 부부에게 주는 뿌듯함은, 모든 힘들었던 나날들을 즐겁고 기쁜 하루하루로 바꾸어 주고 있다는 것이다.

호주에 사는 많은 젊은 한국 부부들이 갖는 공통적인 어려움인 맞벌이와 아이 양육 문제는 우리에게도 크나큰 문제였다. 간호사인 아내는 아침 일찍 출근을 하고, 그 후에 나는 수지를 씻기고 먹이고 옷을 입혀 외국인 여자에게 아이를 맡겨야 했다.

2살이 채 안된 수지는 매일 아침 떨어지지 않으려고 나의 목에 매달려 거세게 몸부림치며 울곤 했다. 수지와 헤어질 때쯤은 서로의 얼굴과 손이 촉촉해 있었고, 울음이 그칠 때까지 문앞에서 발길을 떼지 못하고는 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 여자와 어둠침침한 집에서 하루 종일 있어야 하는 수지를 볼 때마다 우리 부부는 많이 괴로웠고 무척이나 미안했다.

그러던 중, 한국분이 운영하던 유아원을 알게 되어 그곳으로 수지를 보내게 되었는데, 울면서 헤어지던 모습이 차츰 없어지고, 스스로 인사도 하고 내 볼에 뽀뽀도 하곤 했다. 즐거워하는 수지를 보며, 우리 또한 즐거운 마음으로 유아원에 보낼 수가 있었다.

그 후, Carlingford로 이사를 하면서 preschool에 보내게 되었는데, 수지가 다른 아이들보다 유달리 말이 늦고 말수가 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살이 되면서부터 간단한 단어의 한국말을 시작했는데, 4살이 되어서도 긴 문장의 말을 유연하게 하지 못했고, 또 아이들과도 어울리지 않고 늘 혼자였다.

우리는 그때서야 비로소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많은 고민 끝에 이리저리 자문을 얻기에 이르렀다. 걱정스런 마음으로 언어치료사와 정신과 의사도 만났지만, 말이 늦은 것 이외에는 이상이 없다고 했다.

우리는 나름대로 문제의 원인을 분석해 보았다. 첫째로 수지와 부모 간의 대화 부족이었다. 서로가 힘이 들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가족간의 대화가 적었다.

둘째로는 수지에게 많은 친구들을 만나서 어울리게 해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저녁식사 후 1~2시간 게임을 하거나 대화하는 시간을 갖고, 동화책을 많이 읽어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조금의 효과는 보였지만 여전히 또래의 아이들처럼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수지는 다섯 살이 되어 kindergarten에 들어갔다. 또 우리 부부는 수지의 한글 공부를 위해 Pennant Hills에 있는 호주한국학교에 보냈다.

우려했던 대로 수지는 kindergarten에서도 잘 적응을 하지 못하고 힘들어 했다. 그래서 호주한국학교에 가는 것 또한 일주일에 한번, 토요일 하루 몇 시간이기에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친구나 사귀고 한글 공부나 조금씩 하라고 입학시킨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학교에 다니면서, 어느 날부터인가 조금씩 변하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한 달 두 달이 지나면서 한국학교 가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게 되었고 많은 스트레스를 푸는 것 같았다.

서로 말과 정서가 통하는 아이들끼리 만나서 떠들고 놀고 공부하는 것이 아이들의 스트레스 해소와 정서 함양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았다. 몇 달이 지나며 말이 조금씩 많아지고 한국책을 읽어 주면 아는 글자를 읽기 시작했다.

한 일년이 지난 요즘은 귀가 따가울 정도로 조잘대고, 웬만한 한국책은 대충 읽어 뜻을 소화해 낼 정도다. 얼마 전엔 한국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께 '사랑한다'는 편지까지 적어 보냈을 정도다.

아직은 어려운 받침 있는 글자는 잘 쓰지 못하지만 너무나 대견한 일이다. 요사이는 한국에 대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흥미를 가지고 질문하는 것 또한 큰 변화의 하나이다. 얼마나 큰 발전인지 생각하면 우리 부부의 노력도 많았지만 호주한국학교 선생님들의 가르침과 도움에 크게 감사한다.

호주한국학교는 아이들 하나하나를 정성으로 대하시며 철저하게 지도하시는 선생님들이 계시고, 또 체계적인 교육과정으로 책임감 있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학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여러 다양한 행사를 통해 아이들에게 흥미있게 저절로 스며들게 하는 것 같다.

이국 땅에서 일주일에 한번 하는 한국어 공부이지만, 꾸준히 계속 열심히 하다 보면 영어, 한국어를 토대로 제 3, 4의 외국어까지도 잘하는 세계 속의 한국인으로 자랄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아이의 아빠로서 수지가 호주한국학교에 다니는 것이 자랑스럽고, 소중한 기회를 가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직은 자신들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소중한 기회'를 쥐어주는 것은 부모들의 중요한 몫이라고 생각한다. 올해로 10년째 접어드는 이 전통있는 학교에 수지를 보내게 되어 퍽 감사하고 있다.

매주 토요일 아침이면 아빠는 바쁘다. 공주처럼 멋을 내고 가는 수지에게 해주는 '소중한 기회'이기에 부모로서 이까짓 것쯤이야 어찌 귀찮다고 할 수 있을까. 수지야! 건효야! 사랑한다! (2001.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