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우리 애들이 쓴 거 맞아?"
                                                                                                                        나만정 학부모


호주에 올 당시 내 나이는 18살이었다. 어느 새 25년이 지난 지금은 사십도 훨씬 넘은 나이가 되었고 두 딸을 두고 있는 학부모이다. 큰 딸아이는 10학년이며 작은 아이는 8학년이다.

아이들의 아빠와 나는 아이들을 낳기 전부터 우리의 아이들에게 한국인의 긍지와 의지를 심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 전에는 한국말만 하도록 항상 얘기를 했다.

그런데 한국말만 하던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요새 말로 '왕따'를 당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한국말만 하던 아이가 친구들과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성격적으로 내성적이며 말이 없는 아이라서 학교생활도 힘이 든 데다가 의사소통까지 불편한 까닭이었다.

나는 그 때부터 아이가 영어로 말하는 것을 선호했고, 집에서 한두 마디씩 영어로 말하는 것을 묵인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1학년이 지나면서 큰아이는 한국말보다도 영어로 말하는 것을 편안해 했고, 작은 아이도 언니와 얘기할 때 영어를 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이제는 영어보다는 한국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학교 시작할 때 언어의 문제 때문에 겪은 아픔이 있는지라 쉽사리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꼭 써야 한다고 말하기에는 부모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던 중 한글학교에게 다니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는 친구의 조언에 따라 교회에서 운영하는 한글학교에 보내기 시작했다. 별로 달가와하지 않는 두 아이에게 어떤 때는 달래 가며, 어떤 때는 야단도 치며 토요일 아침에는 한글학교에 가야 한다는 강제성을 띠며 보냈다.

싫든지 좋든지 어찌 됐든 토요일에 한번 그것도 3시간밖에 안되는 것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알게 모르게 한글의 중요성과 한국 사람임을 인식시켜 주는 것 같았다.

쓰고, 읽고, 문장을 만들며 쉽지 않은 우리말을 천천히 조금씩 익혀가며 더듬거리며 읽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부모인 나도 한글 교육과 한글학교의 중요성을 다시 인식했다.

그러던 중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서 다니던 토요한글학교를 한동안 쉬게 되었다. 본인들이 적극적으로 원해서 다니던 곳이 아니어서 그랬는지, 아이들은 한글학교에 다니지 않게 된 것을 마치 방학이나 하는 것처럼 즐거워했고 점점 한국말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어느덧 큰아이가 9학년이 되었고, 엄마인 나도 잠시나마 잊었던 한글의 중요성이 인식되는 것 같았다. 한글학교에 막상 보내려고 하니 어느 학교에 아이들을 맡겨야 할지 망설여졌다. 아이가 원해서 가는 것이니만큼 신중하게 잘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데 집으로 놀러온 이웃 엄마가 자기 아이들이 가는 호주한국학교에 대해 자랑을 하며, 아이들이 토요일을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그런 말 속에서도 별 기대 없이 나도 그냥 아이들이 원하는 한글이나 더 배우라는 뜻에서 그곳으로 결정을 했다.

데려오고, 데려다 주고,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이들이 한국어를 쓰고, 읽고, 듣고 하는 것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단지 글을 배우는 것을 넘어서 한국 역사나 문화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배우고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난 6월 한달 온 세계를 뜨겁게 달궜던 월드컵을 우리 가족 또한 흥분된 마음으로 TV를 통해 보다가 문득 큰아이가 아빠께 "아빠, 모든 한국 사람들이 지금 한마음이 된 것처럼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는 순간에 나는 참 무엇인지도 모를 어떤 것이 마음을 뜨겁게 하는 것을 느꼈다.

통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우리 아이들, 어린 마음들도 그 무엇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월드컵 시합이 펼쳐지는 동안 큰아이가 방에서 나오지를 않고, 한영사전을 찾으며, 한국어 사전을 찾으며 밤늦게까지 열심히 글을 쓰고 있었다. 그런 아이를 보면서, 그저 나는 호주한국학교에서 아이에게 통일에 대한 주제로 글짓기 숙제를 하라고 했나 보다 했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놀랍게도 우리 아이가 그 글짓기로 '조국평화통일 기원 글짓기 대회'에서 대상을 받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정말 참 기쁘고 대견스러웠다. 상도 상이지만 우리 아이가 한국말로 글짓기를 해서 인정을 받을 정도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더 가슴이 뿌듯하고 아이가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얼마 전 호주한국학교에서 흥부전 연극에서 큰아이는 흥부 아내 역을 맡아서 했는데, 시간이 나는 대로 그 긴 대사들을 읽고 외우고, 작은아이는 각설이역을 하기 싫다고 투덜대면서도 각설이 노래 연습을 하고 그런 모습 속에서 또 한번 나는 선생님들의 수고와 애씀에 감사드렸다.

지난 아버지날에는 두 아이가 한국학교 수업시간에 아빠께 편지를 쓰고, 그 편지들이 우편으로 학교에서 집으로 보내졌다. 저녁에 들어온 아이들 아빠가 그 편지들을 읽으면서 연방 "이거 우리 애들이 쓴 거 맞아?" 하는 것이었다.

남편조차 놀랄 정도로 아이들의 한국어 실력과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참으로 높아졌음이 연극 연습이나 편지 쓰기 그리고 여러 가지 생활 속에서 보여주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느낄 수 있다. 이 자리를 빌어서 한인 2세들의 한국어와 한국문화 교육에 애쓰시는 호주한국학교 교장선생님과 선생님들 모두에게 참으로 감사를 드린다.

우리가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여기서 태어난 2세들에게 우리 조국의 글과 문화를 전해 준다는 것만큼 보람된 일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문화와 언어를 가르치는 것은 우리 2세들에게 우리의 혼과 얼을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는 다문화사회에서 살고 있다. 자기의 것을 상실한 개인이나 민족에게는 남의 것을 바로 보고 배우는 역량이 없으리라 생각된다.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남도 사랑할 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참으로 나의 가진 언어와 문화를 소중히 여길 때, 비로소 남의 문화도 성공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다문화사회 속에서 조화를 이루고 살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2002.10.11)